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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관련 일본 외교관 편지 발견!

by 창의날다 2021. 11. 17.

 

을미사변 '명성황후 시해' 관련 일본 외교관 편지 발견!

다들 알고 있는 내용이겠지만, 을미사변으로도 불리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1895년 10월 8일 일본 육군 중장 출신 미우라 고로 당시 공사의 지휘로 일본 군인, 외교관 등이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암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태운 사건이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에 대한 역사적 내용(백과사전)은 오늘 주제 아래에 따로 올렸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쉬웠다” 일본 외교관 추정 편지 발견

온라인 뉴스 보도를 보면서 좀 열 받는 내용,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쉬웠다" 온라인 상이라 욕은 할 수 없지만, 분노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모이면서 최고 지도자 층이었던 명성황후 시해가 '쉬웠다!' 이 한 단어가 주는 메시지는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감정을 추스리고 '명성황후 시해' 관련 일본 외교관 편지에 대한 팩트를 살펴보겠습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을미사변 다음날, 일본 외교관이 본국으로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가 공개됐습니다.
본 내용은 일본 아사히 신분에 16일 보도된 내용입니다.
곧 1895년 10월 8일 고종의 비 명성황후(1851∼1895)를 암살한 사건에 가담했던 일본 외교관이 사건 다음 날 “우리들이 왕비를 죽였다”며 당시 정황을 자세하게 밝힌 편지가 발견됐다는 것입니다.

명성황후 시해에 관련한 이 서신은,  나고야에 거주 중인 일본계 미국인 우표·인지 연구가 스티브 하세가와(77)가 골동품 시장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후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의 저자인 재일 역사학자 김문자 씨가 진품이라고 판독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아직도 불명확한 점이 많은 사건의 세부를 해명하는 열쇠가 되는 가치가 높은 자료”라고 말했습니다. 

편지를 쓴 당사자는 당시 조선에 설치된 일본 영사관의 보조로 일하던 외교관 호리구치 구마이치(1865∼1945)였습니다. 호리구치 구마이치 외교관은 1894년 11월 17일부터 1895년 10월 18일까지 고향 친구인 니가타현의 다케이시 데이쇼에게 8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그중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 9일 자 편지에서 사건 현장에서 했던 행동을 상세하게 적어서 보낸 것입니다. 8통의 서신 중에서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정황을 묘사한 이 서신만 밀봉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호리구치는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에 대해서 “진입은 내가 맡은 임무였다. 담을 넘어 .... 간신히 오쿠고텐에 이르러 왕비를 시해했다”라고 전달했습니다. 또 이 서신에서 “(명성황후 시해)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며 당시 자신이 느낀 점까지 표현해서 전달했습니다.




추후 호리구치는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가담자로 일본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정직 1년이라는 가벼운 처분만 받았습니다.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에 대한 이번 일본 외교관 서신을 통해서도 느낀느 것은 당시 정말 얼마나 국력이 약했으면, 그리고 매국노들이 판을 쳤으면 한 나라의 국모, 지도자가 이리 쉽게, 잔인하게, 비참하게 죽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또한 정말 무엇보다도 자국 의 국력이 중요함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내가 그리고 우리 나라가 국력을 키워야 이런 역사적 수모, 슬픔을 다시는 겪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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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에 대하여!!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을미사변 [乙未事變] (두산백과)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역사적 배경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朴泳孝)·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조선 침략을 위한 영향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 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 정부는, 러시아 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는데 명성황후가 이를 주도하였다. 이에 친일세력인 박영효는 1895년 7월 명성황후 시해 음모를 계획하였다가 발각되어 일본으로 달아나고 친일파는 세력을 상실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閔泳煥)을 주미전권공사(駐美全權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魚允中)·김가진(金嘉鎭)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李範晋)·이완용(李完用)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게다가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조선 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 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 정계에서는 배일 세력이 증가하였다.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사건의 전개

일본에서는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 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에 있는 낭인(浪人)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安達]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孔德里) 아소정(我笑亭)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 경찰관 및 친일 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 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閔泳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 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다 사망하였다. 흉도(兇徒)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玉壺樓)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시신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에 묻었다.

 

명성황후 시해, 을미사변  결과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여 친일파인 유길준(兪吉濬)·서광범(徐光範)·정병하(鄭秉夏)·김종한·권형진(權瀅鎭) 등이 내각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명성황후 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 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의 전말이 외부에 알려졌다. 조선 국민의 대일 감정은 극도로 나빠져 제천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국제적으로도 거센 비난이 일어났다. 이에 구미 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 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사건 처리 방안으로서 미우라 공사를 해임하고, 고무라[小村]를 판리공사(辦理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廣島]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 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전원 석방시켰다. 을미사변은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계기가 되었고, 이에 친일 내각은 실각하고 김홍집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친일파로 몰려 군중들에게 피살되었다. 조선은 러시아의 보호 속에서 자주권이 훼손되고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내각은 친러파가 장악하면서 일본은 식민지화 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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